믿음의 부족 때문에 응답 받지 못하는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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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rmons on Prayers
James W. Knox 지음 / 이우진 옮김
제4장 믿음의 부족 때문에 응답 받지 못하는 기도
1. 우리는 기도에 대해 공부하고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기도가 응답 받지 못하는 이유는 바로 이기심 때문이라는 점도 살펴봤습니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하는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것이나 다른 형제 자매들을 위한 게 아니라 우리 자신의 육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한 것입니다. 야고보서 4장에서는 “너희가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그것을 너희의 정욕에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약4:3)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2. 이기적인 동기로 하는 기도는 결코 응답 받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기도에 응답해주신다고 말씀하신 적이 없습니다. 기도하는 사람의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과 하나가 되고 하나님의 뜻에 동의하는 것이 바로 기도입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구하는 것이 바로 기도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자신을 통해 이루어지기를 구하는 것이 바로 기도입니다.
3. 우리는 오늘 믿음의 부족으로 인해 응답 받지 못하는 기도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는 기도가 믿음의 부족으로 인해 응답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너무나도 자주 하나님께서 이미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을 달라고 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 약속하신 것을 우리는 의심하면서 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기도는 믿음의 기도가 아니라 불신의 기도입니다.
4. 하나님께서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을 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믿음의 기도가 아닙니다. 이러한 기도는 결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성경은 우리가 만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면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고 결코 멸망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자신들의 구원을 잃어버리지 않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기독교인들을 많이 봤습니다. 자신들이 죽으면 하늘나라로 데려가 달라고 구하는 기독교인들도 많이 봤습니다. 이러한 기도가 보여주는 게 무엇인지 아십니까? 이러한 기도는 우리가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는 증거일 뿐입니다.
5. 이제 신약성경에 나온 사도 바울의 기도를 통해 그리스도인의 기도란 무엇인지 공부해보겠습니다. 에베소서 3장을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바라노니 너희를 위한 나의 환난들로 인해 너희는 낙심하지 말라. 그것은 너희의 영광이니라. 이런 까닭에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곧 하늘과 땅에 있는 온 가족에게 이름을 주신 분께 무릎을 꿇고 비노니 그분께서 자신의 영광의 풍성함에 따라 자신의 영을 통해 속사람이 능력으로 강건하게 됨을 너희에게 허락하시며 믿음을 통해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속에 거하게 하시고 또 너희가 사랑 안에서 뿌리를 내리고 터를 잡아 모든 성도들과 함께 너비와 길이와 깊이와 높이가 어떠함을 능히 깨닫고 지식을 뛰어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심으로 충만하게 되기를 구하노라. 이제 우리 안에서 일하는 권능에 따라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 이상으로 심히 넘치도록 능히 행하실 분에게 곧 그분에게 영광이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해 교회 안에서 모든 시대에 걸쳐 끝없는 세상까지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엡3:13-21)
6. 이 본문을 통해 다시 신약성경에 나오는 기도는 단 한번도 자신을 위해 무엇인가를 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볼 수 있습니다. 신약성경에 나온 기도에는 단 한번도 자신을 위해 하나님께 무엇인가를 해 달라고 구하는 것이 없습니다. 단 한 마디도 자신을 위해 구하지 않습니다. 무엇인가를 달라고 하지도 않습니다. 신약성경에 나온 기도 중에는 어린아이가 산타클로스에게 선물을 달라고 조르는 것 같은 기도는 단 하나도 없습니다. 신약성경에 나온 모든 기도는 하나님의 영광과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구하는 것이었습니다.
7.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세상을 위해 기도하지 않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신약성경에 나온 기도 중 그 어느 것도 이 세상의 유익을 구하는 기도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세상을 위해 기도하지 않으시고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왜 그럴까요? 성경에 기록된 말씀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앞으로 미래에는 전세계적인 어려움이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 미리 말씀하신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해 달라고 기도할 수는 없습니다. 성경은 미래에 적그리스도가 등장하여 세계를 통치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적그리스도가 오지 않게 해 주시고 짐승의 표 같은 것도 없게 해 달라고 기도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8. 만일 하나님께서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그 문은 넓고 그 길이 넓어 거기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그 문은 좁고 그 길이 좁아 그것을 찾는 자가 적으니라.”(마7:13-14)고 말씀하셨다면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을 넓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시간 낭비일 뿐입니다. 우리는 세상을 위해 기도하지 않습니다.
9. 신약성경에 나온 모든 기도는 형제 자매들을 위해 하나님께 간구하는 것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에베소서 3:12을 보면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은 낙심하고 있었습니다. 낙심한 사람은 건전한 생각을 할 수 없으며 적절하게 행동할 수도 없습니다. 낙심한 사람은 제대로 설 수도 없습니다. 에베소에 있는 믿는 사람들은 핍박으로 인해 낙심했습니다. 그들은 세상에서 당하는 환난으로 인해 낙심했습니다. 자신들이 처한 처참한 상황으로 인해 낙심했습니다. 그들은 이 세상을 바라볼 때 아무런 소망이 없는 사람들이었으며 낙심하여 절망 가운데 있었습니다.
10. 사도 바울은 세상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에 그들이 두려움과 문제와 불확실과 낙심 가운데 있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무릎을 꿇고 하나님 아버지께 그들을 위해 기도한 것입니다. 우리가 왜 서로를 위해 기도해야 하는지 아십니까? 우리 교회에는 이 세상의 어려움으로 인해 낙심한 사람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회에는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인해 낙심한 사람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회에는 세상에서의 유혹으로 인해 쓰러진 지체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회에는 세상 교육과 정치와 마귀와 이단과 거짓 종교로 인해 낙심하고 넘어진 지체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서로가 낙심하지 않도록 넘어지지 않도록 서로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11. 이제 사도 바울이 기도할 때 가지고 있던 생각이 무엇인지 살펴보겠습니다. 에베소에 있던 성도들은 당시 정치적인 상황을 지켜보면서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사탄의 권세를 보면서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이 세상 종교의 핍박으로 인해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12. 사도 바울이 기도할 때 가지고 있던 생각은 무엇이었을까요? 8절을 보겠습니다. “그분께서 모든 성도들 중에서 가장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헤아릴 수 없는 그리스도의 부요함을 내가 이방인들 가운데 선포하게 하고”
13. 사도 바울은 무엇을 보고 있었습니까? 그는 주식시장을 보고 있던 게 아니었습니다. 그는 “헤아릴 수 없는 그리스도의 부요함”을 보고 있었습니다. 그는 통장잔고를 보고 있던 게 아니라 “헤아릴 수 없는 그리스도의 부요함”을 보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가 낙심하지 않을 수 있었던 비결이었습니다. 그는 유엔이나 군대를 보고 있지 않고 전능하신 하나님의 권능을 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어떤 상황에서도 낙심하거나 좌절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어떠한 환경에서도 낙심하지 않았던 것은 그의 마음과 생각이 바른 것으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입니다.
14. 계속해서 9절을 보겠습니다. “또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모든 것을 창조하신 하나님 안에 세상이 시작된 이후로 감추어져 온 이 신비에 참여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든 사람들이 보게 하려 하심이라. 그 목적은 그분께서 이제 교회를 사용하사 하늘의 처소들에 있는 정사들과 권능들에게 하나님의 갖가지 지혜를 알게 하려 하심이라. 이것은 곧 그분께서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작정하신 영원한 목적에 따른 것이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그분의 믿음을 통해 담대함을 가지며 또 확신 있게 나아감을 얻느니라.”(9-12절)
15. 사도 바울이 구했던 것은 교회를 통해 하나님의 위대한 영광을 모든 사람들이 보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교회를 통해 하나님의 광대한 지혜를 모든 사람들이 보게 되는 것을 구했습니다. 교회를 통해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을 모든 사람들이 보게 되는 것을 구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정치 문제나 경제 문제나 사회 문제를 걱정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것들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모든 사람들이 교회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16. 사도 바울은 세상을 위해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교회를 위해 기도했습니다. 이 세상에 있는 교회를 위해 기도했습니다. 그래서 교회가 이 세상에서 바로 서서 복음을 선포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높이고 바른 삶을 살게 해 달라고 기도한 것입니다. 정치적인 상황이나 경제적인 상황이나 교육 문제나 국방 문제 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와 영광이 교회를 통해 이 세상에 드러나는 것입니다.
17. 이 세상이 썩었다고 한탄할게 아니라 교회인 우리가 주님 앞에서 정결하지 못한 것을 한탄해야 합니다. 이 세상 사람들이 쓸데없는 데 돈을 낭비한다고 한탄할게 아니라 교회인 우리가 어디에 돈을 쓰고 있는지 생각해야 합니다. 이 세상이 잘못된 길로 가고 있다고 한탄할 게 아니라 그들을 위해 교회가 선교사들을 보내지 않고 있는 것을 한탄해야 합니다. 이 세상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 못하고 있음을 한탄하는 게 아니라 교회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지 못함을 한탄해야 합니다. 헐리우드가 복음을 전하는 게 아니라 교회가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학교가 성경을 가르치는 게 아니라 교회가 성경을 가르쳐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교회를 통해 일하십니다.
18. 에베소에 있던 성도들이 낙심한 이유는 하나님이 아닌 세상을 바라봤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권능이 아니라 이 세상의 권능을 바라봤기 때문에 낙심한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 앞에 나아와 에베소 성도들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19. 우리가 서로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아십니까? 우리는 서로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이 세상에서 돈이나 악한 사람이나 정부나 마귀로 인해 낙심하지 않고 주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본다면 그러한 것들로 인해 낙심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서로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20. 이 세상 사람들이 가장 큰 관심을 가지는 것은 돈입니다. 사람들은 항상 돈 얘기를 합니다. 돈이 그들의 하나님입니다. 선거에서도 자신들이 부자가 되게 해 줄 사람을 뽑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어떻게 하면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을지 고민합니다. 이미 많은 돈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돈을 잃지는 않을지 걱정합니다. 문제는 그리스도인들도 같은 것을 걱정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21. TV는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온갖 문제를 보여줍니다.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는 전쟁과 기근을 보여줍니다. 불행한 사실은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TV를 보면서 근심과 걱정으로 마음을 가득 채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고 또한 나를 믿으라.”(요 14:1)고 말씀하셨습니다. TV를 통해 우리의 마음이 세상으로 가득 차게 된다면 TV를 꺼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이 세상에 대한 염려와 걱정으로 가득 찰 때 우리는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모든 일에 대한 해답은 하나님께 있기 때문입니다.
22. 이 세상에서 짓는 모든 죄는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는 것입니다. 어떠한 죄도 새로운 게 아닙니다. 요즘 사람들이 짓는 죄는 모두 2천년 전 과거의 사람들이 짓는 죄입니다. 이 세상은 어느 날 갑자기 악해진 게 아니라 예전부터 쭉 악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성도들을 위해 기도한 것입니다.
23. 다시 에베소서 3:14부터 보겠습니다. “이런 까닭에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곧 하늘과 땅에 있는 온 가족에게 이름을 주신 분께 무릎을 꿇고 비노니”(엡3:14-15)
24. 여기에는 중요한 사실이 나옵니다. 사도 바울은 우주 저 편에 있는 알지 못하는 존재에게 기도한 게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하늘에 계신 자신의 아버지께 기도했습니다. 우리는 잘 모르는 존재에게 기도하는 게 아니라 우리의 아버지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설교에서 “너희 중에 누가 자기 아들이 빵을 구하면 그에게 돌을 주겠느냐?”(마 7:9)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빵을 구하는 아들에게 돌을 줄 아버지는 아무도 없다는 것입니다. 생선을 구하는 아들에게 전갈을 줄 아버지는 없습니다.
25. 예수님께서는 “그런즉 너희가 악할지라도 너희 자녀들에게 좋은 선물들을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자기에게 구하는 자들에게 좋은 것들을 얼마나 더 많이 주시겠느냐?”(마7:11)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누구에게 하는 것인 줄 아십니까? 우리는 사랑이 무엇인지 아시며 어떻게 사랑하는지도 아시고 자신이 친히 사랑 자체가 되시는 하늘에 계신 우리의 아버지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여러분에게 가장 좋을 것을 주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믿고 안심할 수 있습니다.
26. 에베소서 3:14-15에서 말씀하고 있는 또 다른 중요한 사실은 우리가 기도를 드리는 대상이 바로 하나님이라는 점입니다. 그분은 지존하신 분입니다. 그분은 거룩하신 분입니다. 그분은 두려우신 분입니다.
27. 1960년대만 해도 미국은 자녀들이 부모님을 사랑하는 게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자녀들은 부모를 존경했습니다. 부모와 자식은 서로 사랑하는 관계였지만 동등한 관계는 아니었습니다. 부모는 자녀를 사랑했지만 권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부모와 자녀가 완전 동등한 관계가 되어버렸습니다. 자녀들과 친구처럼 지내는 게 자랑인 시대가 되어 버렸습니다. 지금은 부모에 대한 존경을 잃어버렸습니다.
28.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시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전 우주를 통치하시는 위대한 하나님이십니다. 오늘날 배교한 교회에서는 하나님을 교회의 회원 수준으로 격하시켜버렸습니다. 오늘날 교회에서는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존경하고 존중하는 것을 완전히 잃어버린 시대입니다.
29. 계속해서 16절을 보겠습니다. “그분께서 자신의 영광의 풍성함에 따라 자신의 영통해 속 사람이 능력으로 강건하게 됨을 너희에게 허락하시며”
30. 사도 바울은 지금 하나님께 간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한 일을 근거로 주님께 간구하는 게 아닙니다. 그는 자신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전도지를 나눠주었으며 얼마나 많은 선행을 했는지 또는 얼마나 많은 헌금을 했는지를 언급하며 하나님께 나아갔던 게 아닙니다.
31. 예수님께서 누구복음 17장에서 하신 말씀을 기억하십니까?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그 모든 일들을 행한 뒤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니이다. 우리는 해야 할 우리의 의무를 하였나이다, 하라.”(눅17:10)
32. 우리가 우리인 것은 우리 스스로의 능력으로 된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이 기도하기에 합당하지 못한 존재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 사람에게도 기도하기에 합당한 구원자가 계십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 기도하기에 합당하지 않다고 합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 기도하기에 합당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오직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 만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 기도할 충분한 자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33.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의 기도에 응답해 주셔야 할 의무를 가지고 계시지 않습니다. 어느 누구도 하나님께로부터 기도 응답을 받아낼 권리를 가진 사람은 없습니다.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셔야 할 의무가 하나님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주문을 하거나 명령을 하기 위해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은사주의자들 중에는 기도에 응답해 달라고 하나님께 명령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그러한 게 없습니다. 어느 누구도 자신의 소원을 들어달라고 하나님께 명령할 수는 없습니다.
34. 하나님 앞에서는 자신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 게 중요합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께 당연히 받을 게 있다면 그것은 지옥에서 고통 당하는 형벌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통해 주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사실에 근거해 주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나님의 영광의 풍성함에 따라, 하나님의 선하심으로 인해 주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35. 다시 16절을 보겠습니다. “그분께서 자신의 영광의 풍성함에 따라 자신의 영을 통해 너희를 부자가 되게 하시며” 성경은 그렇게 말씀하지 않습니다. “그분께서 자신의 영광의 풍성함에 따라 너희의 육신을 편안하게 하시며” “그분께서 자신의 영광의 풍성함에 따라 너희의 정욕을 채워주시며” 성경은 결코 그렇게 말씀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분께서 자신의 영광의 풍성함에 따라 자신의 영을 통해 속사람이 능력으로 강건하게 됨을 너희에게 허락하시며”
36. 사도 바울은 무엇을 위해 간구했는지 아십니까? 바울은 다른 성도들의 속 사람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바울은 단 한번도 다른 성도들의 겉 사람의 안락함을 위해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단 한번도 다른 성도가 부자가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다른 성도의 속 사람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성령님께서 공급해주시는 능력으로 다른 성도의 속 사람이 강건해져서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살 수 있도록 해 달라고 기도한 것입니다.
37.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하는 기도는 육신의 정욕과 안락함을 위한 것이거나 물질적인 것을 구하는 기도입니다. 그러나 신약성경에 나온 모든 기도는 영적인 것을 구하는 기도이며 속 사람이 강건해 지기를 구하는 기도입니다. 우리의 기도가 왜 대부분 응답 받지 못하는지 아십니까?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 보다는 육신의 정욕을 위해 구하기 때문입니다.
38.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이 이 세상에서 건강하고 행복하게 잘 사는 걸 바라시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의 속 사람이 더욱 강건해 져서 예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이르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참된 기쁨과 참된 평안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여러분이 성령의 열매를 맺기 원하십니다. 성령의 열매는 여러분이 이 세상에서 평안하고 안락하게 사는 것과는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그것은 주님 안에서 누리는 사랑과 기쁨과 평안입니다.
39. 저는 암으로 죽는 가운데서도 기쁨과 사랑과 평안을 잃지 않는 사람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는 비록 암으로 죽어가고 있었지만 기쁨으로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저는 건강한 몸을 가졌지만 비참하게 사는 사람도 본 적이 있습니다. 한 사람은 암으로 죽어가면서도 기뻐했지만 다른 한 사람은 건강한 몸을 가지고도 비참하게 살았습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한 사람의 속 사람은 강건했지만 다른 사람의 속 사람은 그렇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40. 계속해서 17절을 보겠습니다. “믿음을 통해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속에 거하게 하시고 또 너희가 사랑 안에서 뿌리를 내리고 터를 잡아”
41.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거하신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적인 삶에 있어서는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들어와 거하신다는 사실을 믿지 못하는 것처럼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설교를 들으면 다 아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마음속에 거하신다는 사실을 정말로 믿지는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매 순간 이러한 사실을 믿으면서 산다면 어떠한 유혹이 와도 이겨낼 것이고 어떠한 일이 벌어져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며 어떠한 일로도 낙심하지 않을 것입니다.
42. 사도 바울이 지금 무엇을 위해 기도하고 있는지 아십니까? 그는 무릎을 꿇고 그리스도인들이 머리로 아는 것을 마음으로 믿게 해 달라고 기도한 것입니다. 머리로 아는 것을 실제 생활에서도 누릴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한 것입니다.
43. 그리스도인들이 왜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로 인해 두려워하는지 아십니까? 자신들의 마음속에 누가 거하시는지 모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마음속에 거하고 계시다면 우리에게 무엇이 더 필요하겠습니까? 우리 안에 거하시는 분이 누구인지 안다면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로 인해 낙심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44. 마태복음 6장을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생명을 위해 너희가 무엇을 먹을까 혹은 무엇을 마실까, 너희 몸을 위해 너희가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생명이 음식보다 소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옷보다 소중하지 아니하냐? 공중의 날짐승들을 보라. 그것들은 씨 뿌리지도 아니하고 거두지도 아니하며 곳간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그것들을 먹이시나니 너희는 그것들보다 훨씬 더 낫지 아니하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자기 키에 일 큐빗을 더할 수 있겠느냐? 또 너희가 어찌하여 옷을 위해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들이 어떻게 자라는지 깊이 생각해 보라. 그것들은 수고도 아니 하고 길쌈도 아니 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자기의 모든 영광 중에 있던 솔로몬도 이것들 중 하나와 같이 차려입지 못하였느니라. 그러므로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질 들풀도 하나님께서 이렇게 입히시거든, 오 너희 믿음이 적은 자들아, 하물며 너희는 더 잘 입히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우리가 무엇을 먹을까? 혹은, 우리가 무엇을 마실까? 혹은, 우리가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 모든 것은 이방인들이 구하나니)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필요한 줄 아시느니라. 오직 너희는 첫째로 하나님의 왕국과 그분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25-33) 이것은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45. 사도 바울이 왜 에베소 성도들의 속 사람을 위해 기도했는지 아십니까? 왜 그는 다른 그리스도인들의 물질적인 필요가 아닌 속 사람을 위해 기도했을까요? 바울은 하나님께서 이미 그리스도인들의 모든 물질적인 필요를 아시고 공급해 주신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믿는 모든 사람들의 물질적인 필요를 채워주시겠다고 이미 성경을 통해 약속하셨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이미 약속하신 것을 구하면 그것은 믿음의 기도가 아니라 오히려 불신의 기도인 것입니다.
46.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먹이시고 입히실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마음이 물질적인 것으로 가득 차서 염려하거나 걱정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의 왕국과 그분의 의”로 가득 차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대부분의 기도시간을 어떻게 보내는지 아십니까? 우리는 물질적인 것들을 구하는데 우리의 기도시간을 낭비해 버립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공급해주지 않으시는 것처럼 우리는 하나님께 물질적인 것들을 달라고 요구하는 데에만 시간을 보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구하지 않을 때도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을 공급해 주셨고 앞으로도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들을 공급해 주실 것입니다.
47. 빌립보서 4장을 보겠습니다. “빌립보 사람들아, 이제 너희도 알거니와 복음의 초기에 내가 마케도니아를 떠날 때에 주고받는 일로 나와 나눈 교회가 오직 너희 외에는 없었느니라. 심지어 데살로니가에 있을 때에도 너희가 한 번 그리고 또 다시 내 필요를 위해 보내었느니라.”(빌4:15-16) 빌립보에 있던 성도들은 교회의 선교사역을 위해 물질로 지원하고 있었습니다.
48. 계속해서 다음 절을 보겠습니다. “나는 선물을 바라지 아니하며 오직 너희 회계장부에 넘치게 될 열매를 바라노라. 오직 내게는 모든 것이 있고 또 풍부하니라. 에바브로디도 편에 너희가 보낸 것들을 받았으므로 내가 풍족한데 이것은 달콤한 냄새의 향기요 받으실 만한 희생물이며 하나님을 매우 기쁘게 한 것이니라.”(17-18절) 빌립보 성도들은 선교사역을 위해 희생적으로 물질적인 지원을 했습니다. 복음전파를 위해 자신들의 물질을 희생적으로 드렸던 것입니다.
49. 복음전파를 위해 자신들의 물질을 희생한 사람들에게 주시는 말씀이 바로 19절입니다. “오직 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해 영광 가운데서 자신의 부요하심에 따라 너희의 모든 필요를 공급하시리라.”
50. 사람들이 왜 물질적인 것을 구하고 있는지 아십니까?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않거나 주님의 사역을 위해 물질을 사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선교사역을 위해 물질을 사용하는 사람들에게 그들의 필요를 공급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왕국과 그분의 의를 구하며 선교사역을 위해 물질을 드린다면 우리는 물질에 대해 염려하지 않아도 됩니다. 먼저 하나님의 왕국을 구하면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해 주시겠다고 주님께서는 약속하셨습니다.
51. “어느 때고 누가 자기 비용을 들여 전쟁에 나가느냐? 누가 포도원을 만들고 그것의 열매를 먹지 아니하느냐? 누가 양 떼를 먹이고 그 양 떼의 젖을 먹지 아니하느냐?”(고전9:7) 군사로 복무하는 사람이 군복이나 군화나 무기를 자기 비용을 들여 구매하지는 않습니다. 군대에 있는 동안에는 필요한 모든 것을 정부에서 공급해 줍니다. 우리는 스스로 그리스도의 군사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영적 전쟁을 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를 군대로 부르신 분께서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해 주실 것입니다.
52.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필요를 공급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미 약속하신 것을 달라고 구하고 있다면 우리는 시간낭비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물질적인 필요를 채워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속 사람이 강건해지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주님께 자신을 내어 드리지 않으면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영적 전쟁에서 패배하는 이유는 속 사람이 전혀 성장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53. 다시 에베소서 3장으로 돌아가겠습니다. “믿음을 통해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속에 거하게 하시고 또 너희가 사랑 안에서 뿌리를 내리고 터를 잡아 모든 성도들과 함께 너비와 길이와 깊이와 높이가 어떠함을 능히 깨닫고 지식을 뛰어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심으로 충만하게 되기를 구하노라.”(엡4:17-19)
54. 18절은 이상한 구절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너비와 길이와 깊이와 높이란 대체 무엇일까요? 이것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는 문맥을 살펴봐야 합니다. 17절에서는 사랑 안에서 뿌리를 내리고 터를 잡는다고 하고 19절에서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55. 사도 바울은 다른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사랑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알게 해 달라고 구했습니다. 우리를 향한 그리스도의 사랑은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게 넓어서 헤아릴 수조차 없습니다. 우리를 향한 주님의 사랑은 매우 깊어서 그것을 측량할 수 없습니다. 우리를 향한 주님의 사랑은 너무 높아서 그것을 넘어설 수 없습니다.
56.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이 주님의 사랑을 알게 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자신의 목숨을 내어 주신 그 사랑을 알게 해 달라고 간구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은 우리가 사랑스러운 사람들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가 주님의 원수였을 때 주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원수였을 때도 우리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어 주셨다면 자녀가 된 지금은 무엇을 아끼고 주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래서 바울은 주님께서 그들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에베소 성도들이 알기를 원했습니다.
57. 17절에서는 사랑 안에서 뿌리를 내리고 터를 잡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이 세상에서 낙심하지 않게 되고 좌절하거나 실망하지 않게 됩니다. 이 세상에서 쓰러지지 않고 무너지지 않고 좌초되지 않기 위해서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뿌리를 내리고 터를 잡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혼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확실히 알게 되면 우리는 그 무엇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고 아무것도 염려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랑에 뿌리를 내린다면 어떠한 일이 일어나도 낙심하거나 좌절하지 않을 것입니다.
58.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그 말씀을 기뻐하는 사람은 물가에 심은 나무 같다고 고백했습니다(시1:2-3). 하나님의 사랑에 뿌리를 내리고 터를 잡은 사람을 좌절시킬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59. 바울은 다른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께서 그들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알게 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이 세상에 있는 그 무엇이나 하늘이나 지옥에 있는 그 무엇도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끊을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바울은 그 사랑의 너비와 길이와 깊이와 높이를 다른 그리스도인들이 알게 해 달라고 간구한 것입니다.
60. 모든 좋은 선물은 하나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 옵니다. “모든 좋은 선물과 모든 완전한 선물은 위에서 오며 빛들의 아버지로부터 내려오거니와 그분께는 변함도 없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느니라.”(약1:17)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주셨습니다.
61.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자신의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것은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멸망하지 않고 영존하는 생명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3:16) “하나님께서 자신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사 우리가 그분을 통해 살게 하셨은즉 이것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향해 나타났느니라.”(요일4:9) 우리는 이러한 구절을 머리로 알 수도 있고 인용할 수도 있지만 우리의 삶에는 전혀 적용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62. 사도 바울이 기도했던 게 무엇인지 아십니까? “지식을 뛰어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심으로 충만하게 되기를 구하노라.”(엡3:19) 우리가 이러한 것을 단순히 머리로만 아는 게 아니라 지식을 완전히 뛰어넘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뿌리를 내리고 터를 잡아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63. 단지 아는 것으로 그치는 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의 삶을 통해 나타나야 합니다. 여러분은 단순하게 사랑한다고 말하는 남편이나 아내보다 예수님처럼 사랑하는 남편이나 아내를 원할 것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사랑에 대해 수많은 구절을 찾아줄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 삶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보여줄 수 있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랑하셨던 것처럼 사랑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64. 사도 바울이 에베소 성도들을 위해 무엇을 구했는지 아십니까? 그들이 물질적으로 더 풍성해지기를 구하지도 않았고 그들의 육신이 평안해지기를 구하지도 않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에베소에 있는 모든 성도들의 삶을 통해 드러나게 해 달라고 구했습니다. 그들이 주님의 사랑을 머리로만 아는 게 아니라 마음으로 알게 해 달라고 구했습니다. 주님께서 그들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마음으로 알게 해 달라고 구했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지식을 초월하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의 삶을 주관하게 되면 우리는 최고의 부모가 되고 최고의 남편이 되고 최고의 아내가 되며 최고의 교회 회원이 되고 최고의 시민이 되기 때문입니다.
65. 우리가 에베소서 3장을 통해 배운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형제들을 위해 기도해야 함을 배웠습니다. 그들의 눈이 열려서 이 세상의 권능이 아닌 하나님의 권능을 볼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함을 배웠습니다. 다른 성도들의 관심이 이 세상과 물질적인 것들과 겉 사람이 아닌 속 사람에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함을 배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다른 형제들의 삶을 주관하게 해 주셔서 그들이 이 세상을 살아갈 때 마치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을 사셨던 것처럼 살게 해 달라고 간구해야 함을 배웠습니다.
66. 병든 사람을 치료해 달라고 기도하는 게 잘못된 것은 절대 아닙니다. 다른 형제가 직장을 찾을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게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저는 그러한 것이 잘못된 기도라고 말한 적이 없습니다.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만이 우리가 확신을 가지고 구할 수 있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속 사람이 강건해 지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맞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구하면 반드시 응답 받게 됩니다. 우리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드러낼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맞는 기도이며 응답이 약속된 기도입니다. 이러한 기도는 하나님께 상달되고 응답 받을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습니다.
67. 전 우주를 통치하시는 위대하신 하나님께서 계십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그분 앞에 나아올 수 있는 특권을 받았습니다. 영원하신 분 앞에서 우리가 구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점검해 봐야 합니다. 영원히 가치가 있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봐야 합니다. 무엇이 진짜 중요한 것인지 생각해 봐야 합니다. 여러분이 다른 성도들을 위해 그들의 속 사람이 강건해 지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구하면 우리 교회에는 엄청난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를 도와주시기를 바랍니다.
James W. Knox 지음 / 이우진 옮김
제4장 믿음의 부족 때문에 응답 받지 못하는 기도
1. 우리는 기도에 대해 공부하고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기도가 응답 받지 못하는 이유는 바로 이기심 때문이라는 점도 살펴봤습니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하는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것이나 다른 형제 자매들을 위한 게 아니라 우리 자신의 육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한 것입니다. 야고보서 4장에서는 “너희가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그것을 너희의 정욕에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약4:3)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2. 이기적인 동기로 하는 기도는 결코 응답 받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기도에 응답해주신다고 말씀하신 적이 없습니다. 기도하는 사람의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과 하나가 되고 하나님의 뜻에 동의하는 것이 바로 기도입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구하는 것이 바로 기도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자신을 통해 이루어지기를 구하는 것이 바로 기도입니다.
3. 우리는 오늘 믿음의 부족으로 인해 응답 받지 못하는 기도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는 기도가 믿음의 부족으로 인해 응답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너무나도 자주 하나님께서 이미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을 달라고 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 약속하신 것을 우리는 의심하면서 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기도는 믿음의 기도가 아니라 불신의 기도입니다.
4. 하나님께서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을 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믿음의 기도가 아닙니다. 이러한 기도는 결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성경은 우리가 만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면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고 결코 멸망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자신들의 구원을 잃어버리지 않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기독교인들을 많이 봤습니다. 자신들이 죽으면 하늘나라로 데려가 달라고 구하는 기독교인들도 많이 봤습니다. 이러한 기도가 보여주는 게 무엇인지 아십니까? 이러한 기도는 우리가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는 증거일 뿐입니다.
5. 이제 신약성경에 나온 사도 바울의 기도를 통해 그리스도인의 기도란 무엇인지 공부해보겠습니다. 에베소서 3장을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바라노니 너희를 위한 나의 환난들로 인해 너희는 낙심하지 말라. 그것은 너희의 영광이니라. 이런 까닭에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곧 하늘과 땅에 있는 온 가족에게 이름을 주신 분께 무릎을 꿇고 비노니 그분께서 자신의 영광의 풍성함에 따라 자신의 영을 통해 속사람이 능력으로 강건하게 됨을 너희에게 허락하시며 믿음을 통해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속에 거하게 하시고 또 너희가 사랑 안에서 뿌리를 내리고 터를 잡아 모든 성도들과 함께 너비와 길이와 깊이와 높이가 어떠함을 능히 깨닫고 지식을 뛰어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심으로 충만하게 되기를 구하노라. 이제 우리 안에서 일하는 권능에 따라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 이상으로 심히 넘치도록 능히 행하실 분에게 곧 그분에게 영광이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해 교회 안에서 모든 시대에 걸쳐 끝없는 세상까지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엡3:13-21)
6. 이 본문을 통해 다시 신약성경에 나오는 기도는 단 한번도 자신을 위해 무엇인가를 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볼 수 있습니다. 신약성경에 나온 기도에는 단 한번도 자신을 위해 하나님께 무엇인가를 해 달라고 구하는 것이 없습니다. 단 한 마디도 자신을 위해 구하지 않습니다. 무엇인가를 달라고 하지도 않습니다. 신약성경에 나온 기도 중에는 어린아이가 산타클로스에게 선물을 달라고 조르는 것 같은 기도는 단 하나도 없습니다. 신약성경에 나온 모든 기도는 하나님의 영광과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구하는 것이었습니다.
7.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세상을 위해 기도하지 않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신약성경에 나온 기도 중 그 어느 것도 이 세상의 유익을 구하는 기도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세상을 위해 기도하지 않으시고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왜 그럴까요? 성경에 기록된 말씀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앞으로 미래에는 전세계적인 어려움이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 미리 말씀하신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해 달라고 기도할 수는 없습니다. 성경은 미래에 적그리스도가 등장하여 세계를 통치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적그리스도가 오지 않게 해 주시고 짐승의 표 같은 것도 없게 해 달라고 기도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8. 만일 하나님께서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그 문은 넓고 그 길이 넓어 거기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그 문은 좁고 그 길이 좁아 그것을 찾는 자가 적으니라.”(마7:13-14)고 말씀하셨다면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을 넓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시간 낭비일 뿐입니다. 우리는 세상을 위해 기도하지 않습니다.
9. 신약성경에 나온 모든 기도는 형제 자매들을 위해 하나님께 간구하는 것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에베소서 3:12을 보면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은 낙심하고 있었습니다. 낙심한 사람은 건전한 생각을 할 수 없으며 적절하게 행동할 수도 없습니다. 낙심한 사람은 제대로 설 수도 없습니다. 에베소에 있는 믿는 사람들은 핍박으로 인해 낙심했습니다. 그들은 세상에서 당하는 환난으로 인해 낙심했습니다. 자신들이 처한 처참한 상황으로 인해 낙심했습니다. 그들은 이 세상을 바라볼 때 아무런 소망이 없는 사람들이었으며 낙심하여 절망 가운데 있었습니다.
10. 사도 바울은 세상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에 그들이 두려움과 문제와 불확실과 낙심 가운데 있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무릎을 꿇고 하나님 아버지께 그들을 위해 기도한 것입니다. 우리가 왜 서로를 위해 기도해야 하는지 아십니까? 우리 교회에는 이 세상의 어려움으로 인해 낙심한 사람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회에는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인해 낙심한 사람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회에는 세상에서의 유혹으로 인해 쓰러진 지체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회에는 세상 교육과 정치와 마귀와 이단과 거짓 종교로 인해 낙심하고 넘어진 지체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서로가 낙심하지 않도록 넘어지지 않도록 서로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11. 이제 사도 바울이 기도할 때 가지고 있던 생각이 무엇인지 살펴보겠습니다. 에베소에 있던 성도들은 당시 정치적인 상황을 지켜보면서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사탄의 권세를 보면서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이 세상 종교의 핍박으로 인해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12. 사도 바울이 기도할 때 가지고 있던 생각은 무엇이었을까요? 8절을 보겠습니다. “그분께서 모든 성도들 중에서 가장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헤아릴 수 없는 그리스도의 부요함을 내가 이방인들 가운데 선포하게 하고”
13. 사도 바울은 무엇을 보고 있었습니까? 그는 주식시장을 보고 있던 게 아니었습니다. 그는 “헤아릴 수 없는 그리스도의 부요함”을 보고 있었습니다. 그는 통장잔고를 보고 있던 게 아니라 “헤아릴 수 없는 그리스도의 부요함”을 보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가 낙심하지 않을 수 있었던 비결이었습니다. 그는 유엔이나 군대를 보고 있지 않고 전능하신 하나님의 권능을 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어떤 상황에서도 낙심하거나 좌절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어떠한 환경에서도 낙심하지 않았던 것은 그의 마음과 생각이 바른 것으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입니다.
14. 계속해서 9절을 보겠습니다. “또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모든 것을 창조하신 하나님 안에 세상이 시작된 이후로 감추어져 온 이 신비에 참여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든 사람들이 보게 하려 하심이라. 그 목적은 그분께서 이제 교회를 사용하사 하늘의 처소들에 있는 정사들과 권능들에게 하나님의 갖가지 지혜를 알게 하려 하심이라. 이것은 곧 그분께서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작정하신 영원한 목적에 따른 것이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그분의 믿음을 통해 담대함을 가지며 또 확신 있게 나아감을 얻느니라.”(9-12절)
15. 사도 바울이 구했던 것은 교회를 통해 하나님의 위대한 영광을 모든 사람들이 보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교회를 통해 하나님의 광대한 지혜를 모든 사람들이 보게 되는 것을 구했습니다. 교회를 통해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을 모든 사람들이 보게 되는 것을 구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정치 문제나 경제 문제나 사회 문제를 걱정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것들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모든 사람들이 교회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16. 사도 바울은 세상을 위해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교회를 위해 기도했습니다. 이 세상에 있는 교회를 위해 기도했습니다. 그래서 교회가 이 세상에서 바로 서서 복음을 선포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높이고 바른 삶을 살게 해 달라고 기도한 것입니다. 정치적인 상황이나 경제적인 상황이나 교육 문제나 국방 문제 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와 영광이 교회를 통해 이 세상에 드러나는 것입니다.
17. 이 세상이 썩었다고 한탄할게 아니라 교회인 우리가 주님 앞에서 정결하지 못한 것을 한탄해야 합니다. 이 세상 사람들이 쓸데없는 데 돈을 낭비한다고 한탄할게 아니라 교회인 우리가 어디에 돈을 쓰고 있는지 생각해야 합니다. 이 세상이 잘못된 길로 가고 있다고 한탄할 게 아니라 그들을 위해 교회가 선교사들을 보내지 않고 있는 것을 한탄해야 합니다. 이 세상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 못하고 있음을 한탄하는 게 아니라 교회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지 못함을 한탄해야 합니다. 헐리우드가 복음을 전하는 게 아니라 교회가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학교가 성경을 가르치는 게 아니라 교회가 성경을 가르쳐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교회를 통해 일하십니다.
18. 에베소에 있던 성도들이 낙심한 이유는 하나님이 아닌 세상을 바라봤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권능이 아니라 이 세상의 권능을 바라봤기 때문에 낙심한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 앞에 나아와 에베소 성도들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19. 우리가 서로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아십니까? 우리는 서로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이 세상에서 돈이나 악한 사람이나 정부나 마귀로 인해 낙심하지 않고 주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본다면 그러한 것들로 인해 낙심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서로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20. 이 세상 사람들이 가장 큰 관심을 가지는 것은 돈입니다. 사람들은 항상 돈 얘기를 합니다. 돈이 그들의 하나님입니다. 선거에서도 자신들이 부자가 되게 해 줄 사람을 뽑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어떻게 하면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을지 고민합니다. 이미 많은 돈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돈을 잃지는 않을지 걱정합니다. 문제는 그리스도인들도 같은 것을 걱정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21. TV는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온갖 문제를 보여줍니다.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는 전쟁과 기근을 보여줍니다. 불행한 사실은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TV를 보면서 근심과 걱정으로 마음을 가득 채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고 또한 나를 믿으라.”(요 14:1)고 말씀하셨습니다. TV를 통해 우리의 마음이 세상으로 가득 차게 된다면 TV를 꺼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이 세상에 대한 염려와 걱정으로 가득 찰 때 우리는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모든 일에 대한 해답은 하나님께 있기 때문입니다.
22. 이 세상에서 짓는 모든 죄는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는 것입니다. 어떠한 죄도 새로운 게 아닙니다. 요즘 사람들이 짓는 죄는 모두 2천년 전 과거의 사람들이 짓는 죄입니다. 이 세상은 어느 날 갑자기 악해진 게 아니라 예전부터 쭉 악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성도들을 위해 기도한 것입니다.
23. 다시 에베소서 3:14부터 보겠습니다. “이런 까닭에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곧 하늘과 땅에 있는 온 가족에게 이름을 주신 분께 무릎을 꿇고 비노니”(엡3:14-15)
24. 여기에는 중요한 사실이 나옵니다. 사도 바울은 우주 저 편에 있는 알지 못하는 존재에게 기도한 게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하늘에 계신 자신의 아버지께 기도했습니다. 우리는 잘 모르는 존재에게 기도하는 게 아니라 우리의 아버지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설교에서 “너희 중에 누가 자기 아들이 빵을 구하면 그에게 돌을 주겠느냐?”(마 7:9)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빵을 구하는 아들에게 돌을 줄 아버지는 아무도 없다는 것입니다. 생선을 구하는 아들에게 전갈을 줄 아버지는 없습니다.
25. 예수님께서는 “그런즉 너희가 악할지라도 너희 자녀들에게 좋은 선물들을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자기에게 구하는 자들에게 좋은 것들을 얼마나 더 많이 주시겠느냐?”(마7:11)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누구에게 하는 것인 줄 아십니까? 우리는 사랑이 무엇인지 아시며 어떻게 사랑하는지도 아시고 자신이 친히 사랑 자체가 되시는 하늘에 계신 우리의 아버지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여러분에게 가장 좋을 것을 주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믿고 안심할 수 있습니다.
26. 에베소서 3:14-15에서 말씀하고 있는 또 다른 중요한 사실은 우리가 기도를 드리는 대상이 바로 하나님이라는 점입니다. 그분은 지존하신 분입니다. 그분은 거룩하신 분입니다. 그분은 두려우신 분입니다.
27. 1960년대만 해도 미국은 자녀들이 부모님을 사랑하는 게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자녀들은 부모를 존경했습니다. 부모와 자식은 서로 사랑하는 관계였지만 동등한 관계는 아니었습니다. 부모는 자녀를 사랑했지만 권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부모와 자녀가 완전 동등한 관계가 되어버렸습니다. 자녀들과 친구처럼 지내는 게 자랑인 시대가 되어 버렸습니다. 지금은 부모에 대한 존경을 잃어버렸습니다.
28.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시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전 우주를 통치하시는 위대한 하나님이십니다. 오늘날 배교한 교회에서는 하나님을 교회의 회원 수준으로 격하시켜버렸습니다. 오늘날 교회에서는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존경하고 존중하는 것을 완전히 잃어버린 시대입니다.
29. 계속해서 16절을 보겠습니다. “그분께서 자신의 영광의 풍성함에 따라 자신의 영통해 속 사람이 능력으로 강건하게 됨을 너희에게 허락하시며”
30. 사도 바울은 지금 하나님께 간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한 일을 근거로 주님께 간구하는 게 아닙니다. 그는 자신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전도지를 나눠주었으며 얼마나 많은 선행을 했는지 또는 얼마나 많은 헌금을 했는지를 언급하며 하나님께 나아갔던 게 아닙니다.
31. 예수님께서 누구복음 17장에서 하신 말씀을 기억하십니까?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그 모든 일들을 행한 뒤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니이다. 우리는 해야 할 우리의 의무를 하였나이다, 하라.”(눅17:10)
32. 우리가 우리인 것은 우리 스스로의 능력으로 된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이 기도하기에 합당하지 못한 존재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 사람에게도 기도하기에 합당한 구원자가 계십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 기도하기에 합당하지 않다고 합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 기도하기에 합당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오직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 만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 기도할 충분한 자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33.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의 기도에 응답해 주셔야 할 의무를 가지고 계시지 않습니다. 어느 누구도 하나님께로부터 기도 응답을 받아낼 권리를 가진 사람은 없습니다.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셔야 할 의무가 하나님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주문을 하거나 명령을 하기 위해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은사주의자들 중에는 기도에 응답해 달라고 하나님께 명령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그러한 게 없습니다. 어느 누구도 자신의 소원을 들어달라고 하나님께 명령할 수는 없습니다.
34. 하나님 앞에서는 자신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 게 중요합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께 당연히 받을 게 있다면 그것은 지옥에서 고통 당하는 형벌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통해 주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사실에 근거해 주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나님의 영광의 풍성함에 따라, 하나님의 선하심으로 인해 주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35. 다시 16절을 보겠습니다. “그분께서 자신의 영광의 풍성함에 따라 자신의 영을 통해 너희를 부자가 되게 하시며” 성경은 그렇게 말씀하지 않습니다. “그분께서 자신의 영광의 풍성함에 따라 너희의 육신을 편안하게 하시며” “그분께서 자신의 영광의 풍성함에 따라 너희의 정욕을 채워주시며” 성경은 결코 그렇게 말씀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분께서 자신의 영광의 풍성함에 따라 자신의 영을 통해 속사람이 능력으로 강건하게 됨을 너희에게 허락하시며”
36. 사도 바울은 무엇을 위해 간구했는지 아십니까? 바울은 다른 성도들의 속 사람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바울은 단 한번도 다른 성도들의 겉 사람의 안락함을 위해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단 한번도 다른 성도가 부자가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다른 성도의 속 사람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성령님께서 공급해주시는 능력으로 다른 성도의 속 사람이 강건해져서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살 수 있도록 해 달라고 기도한 것입니다.
37.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하는 기도는 육신의 정욕과 안락함을 위한 것이거나 물질적인 것을 구하는 기도입니다. 그러나 신약성경에 나온 모든 기도는 영적인 것을 구하는 기도이며 속 사람이 강건해 지기를 구하는 기도입니다. 우리의 기도가 왜 대부분 응답 받지 못하는지 아십니까?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 보다는 육신의 정욕을 위해 구하기 때문입니다.
38.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이 이 세상에서 건강하고 행복하게 잘 사는 걸 바라시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의 속 사람이 더욱 강건해 져서 예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이르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참된 기쁨과 참된 평안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여러분이 성령의 열매를 맺기 원하십니다. 성령의 열매는 여러분이 이 세상에서 평안하고 안락하게 사는 것과는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그것은 주님 안에서 누리는 사랑과 기쁨과 평안입니다.
39. 저는 암으로 죽는 가운데서도 기쁨과 사랑과 평안을 잃지 않는 사람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는 비록 암으로 죽어가고 있었지만 기쁨으로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저는 건강한 몸을 가졌지만 비참하게 사는 사람도 본 적이 있습니다. 한 사람은 암으로 죽어가면서도 기뻐했지만 다른 한 사람은 건강한 몸을 가지고도 비참하게 살았습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한 사람의 속 사람은 강건했지만 다른 사람의 속 사람은 그렇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40. 계속해서 17절을 보겠습니다. “믿음을 통해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속에 거하게 하시고 또 너희가 사랑 안에서 뿌리를 내리고 터를 잡아”
41.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거하신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적인 삶에 있어서는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들어와 거하신다는 사실을 믿지 못하는 것처럼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설교를 들으면 다 아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마음속에 거하신다는 사실을 정말로 믿지는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매 순간 이러한 사실을 믿으면서 산다면 어떠한 유혹이 와도 이겨낼 것이고 어떠한 일이 벌어져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며 어떠한 일로도 낙심하지 않을 것입니다.
42. 사도 바울이 지금 무엇을 위해 기도하고 있는지 아십니까? 그는 무릎을 꿇고 그리스도인들이 머리로 아는 것을 마음으로 믿게 해 달라고 기도한 것입니다. 머리로 아는 것을 실제 생활에서도 누릴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한 것입니다.
43. 그리스도인들이 왜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로 인해 두려워하는지 아십니까? 자신들의 마음속에 누가 거하시는지 모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마음속에 거하고 계시다면 우리에게 무엇이 더 필요하겠습니까? 우리 안에 거하시는 분이 누구인지 안다면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로 인해 낙심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44. 마태복음 6장을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생명을 위해 너희가 무엇을 먹을까 혹은 무엇을 마실까, 너희 몸을 위해 너희가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생명이 음식보다 소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옷보다 소중하지 아니하냐? 공중의 날짐승들을 보라. 그것들은 씨 뿌리지도 아니하고 거두지도 아니하며 곳간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그것들을 먹이시나니 너희는 그것들보다 훨씬 더 낫지 아니하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자기 키에 일 큐빗을 더할 수 있겠느냐? 또 너희가 어찌하여 옷을 위해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들이 어떻게 자라는지 깊이 생각해 보라. 그것들은 수고도 아니 하고 길쌈도 아니 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자기의 모든 영광 중에 있던 솔로몬도 이것들 중 하나와 같이 차려입지 못하였느니라. 그러므로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질 들풀도 하나님께서 이렇게 입히시거든, 오 너희 믿음이 적은 자들아, 하물며 너희는 더 잘 입히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우리가 무엇을 먹을까? 혹은, 우리가 무엇을 마실까? 혹은, 우리가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 모든 것은 이방인들이 구하나니)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필요한 줄 아시느니라. 오직 너희는 첫째로 하나님의 왕국과 그분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25-33) 이것은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45. 사도 바울이 왜 에베소 성도들의 속 사람을 위해 기도했는지 아십니까? 왜 그는 다른 그리스도인들의 물질적인 필요가 아닌 속 사람을 위해 기도했을까요? 바울은 하나님께서 이미 그리스도인들의 모든 물질적인 필요를 아시고 공급해 주신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믿는 모든 사람들의 물질적인 필요를 채워주시겠다고 이미 성경을 통해 약속하셨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이미 약속하신 것을 구하면 그것은 믿음의 기도가 아니라 오히려 불신의 기도인 것입니다.
46.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먹이시고 입히실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마음이 물질적인 것으로 가득 차서 염려하거나 걱정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의 왕국과 그분의 의”로 가득 차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대부분의 기도시간을 어떻게 보내는지 아십니까? 우리는 물질적인 것들을 구하는데 우리의 기도시간을 낭비해 버립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공급해주지 않으시는 것처럼 우리는 하나님께 물질적인 것들을 달라고 요구하는 데에만 시간을 보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구하지 않을 때도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을 공급해 주셨고 앞으로도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들을 공급해 주실 것입니다.
47. 빌립보서 4장을 보겠습니다. “빌립보 사람들아, 이제 너희도 알거니와 복음의 초기에 내가 마케도니아를 떠날 때에 주고받는 일로 나와 나눈 교회가 오직 너희 외에는 없었느니라. 심지어 데살로니가에 있을 때에도 너희가 한 번 그리고 또 다시 내 필요를 위해 보내었느니라.”(빌4:15-16) 빌립보에 있던 성도들은 교회의 선교사역을 위해 물질로 지원하고 있었습니다.
48. 계속해서 다음 절을 보겠습니다. “나는 선물을 바라지 아니하며 오직 너희 회계장부에 넘치게 될 열매를 바라노라. 오직 내게는 모든 것이 있고 또 풍부하니라. 에바브로디도 편에 너희가 보낸 것들을 받았으므로 내가 풍족한데 이것은 달콤한 냄새의 향기요 받으실 만한 희생물이며 하나님을 매우 기쁘게 한 것이니라.”(17-18절) 빌립보 성도들은 선교사역을 위해 희생적으로 물질적인 지원을 했습니다. 복음전파를 위해 자신들의 물질을 희생적으로 드렸던 것입니다.
49. 복음전파를 위해 자신들의 물질을 희생한 사람들에게 주시는 말씀이 바로 19절입니다. “오직 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해 영광 가운데서 자신의 부요하심에 따라 너희의 모든 필요를 공급하시리라.”
50. 사람들이 왜 물질적인 것을 구하고 있는지 아십니까?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않거나 주님의 사역을 위해 물질을 사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선교사역을 위해 물질을 사용하는 사람들에게 그들의 필요를 공급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왕국과 그분의 의를 구하며 선교사역을 위해 물질을 드린다면 우리는 물질에 대해 염려하지 않아도 됩니다. 먼저 하나님의 왕국을 구하면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해 주시겠다고 주님께서는 약속하셨습니다.
51. “어느 때고 누가 자기 비용을 들여 전쟁에 나가느냐? 누가 포도원을 만들고 그것의 열매를 먹지 아니하느냐? 누가 양 떼를 먹이고 그 양 떼의 젖을 먹지 아니하느냐?”(고전9:7) 군사로 복무하는 사람이 군복이나 군화나 무기를 자기 비용을 들여 구매하지는 않습니다. 군대에 있는 동안에는 필요한 모든 것을 정부에서 공급해 줍니다. 우리는 스스로 그리스도의 군사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영적 전쟁을 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를 군대로 부르신 분께서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해 주실 것입니다.
52.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필요를 공급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미 약속하신 것을 달라고 구하고 있다면 우리는 시간낭비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물질적인 필요를 채워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속 사람이 강건해지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주님께 자신을 내어 드리지 않으면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영적 전쟁에서 패배하는 이유는 속 사람이 전혀 성장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53. 다시 에베소서 3장으로 돌아가겠습니다. “믿음을 통해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속에 거하게 하시고 또 너희가 사랑 안에서 뿌리를 내리고 터를 잡아 모든 성도들과 함께 너비와 길이와 깊이와 높이가 어떠함을 능히 깨닫고 지식을 뛰어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심으로 충만하게 되기를 구하노라.”(엡4:17-19)
54. 18절은 이상한 구절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너비와 길이와 깊이와 높이란 대체 무엇일까요? 이것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는 문맥을 살펴봐야 합니다. 17절에서는 사랑 안에서 뿌리를 내리고 터를 잡는다고 하고 19절에서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55. 사도 바울은 다른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사랑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알게 해 달라고 구했습니다. 우리를 향한 그리스도의 사랑은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게 넓어서 헤아릴 수조차 없습니다. 우리를 향한 주님의 사랑은 매우 깊어서 그것을 측량할 수 없습니다. 우리를 향한 주님의 사랑은 너무 높아서 그것을 넘어설 수 없습니다.
56.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이 주님의 사랑을 알게 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자신의 목숨을 내어 주신 그 사랑을 알게 해 달라고 간구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은 우리가 사랑스러운 사람들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가 주님의 원수였을 때 주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원수였을 때도 우리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어 주셨다면 자녀가 된 지금은 무엇을 아끼고 주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래서 바울은 주님께서 그들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에베소 성도들이 알기를 원했습니다.
57. 17절에서는 사랑 안에서 뿌리를 내리고 터를 잡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이 세상에서 낙심하지 않게 되고 좌절하거나 실망하지 않게 됩니다. 이 세상에서 쓰러지지 않고 무너지지 않고 좌초되지 않기 위해서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뿌리를 내리고 터를 잡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혼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확실히 알게 되면 우리는 그 무엇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고 아무것도 염려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랑에 뿌리를 내린다면 어떠한 일이 일어나도 낙심하거나 좌절하지 않을 것입니다.
58.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그 말씀을 기뻐하는 사람은 물가에 심은 나무 같다고 고백했습니다(시1:2-3). 하나님의 사랑에 뿌리를 내리고 터를 잡은 사람을 좌절시킬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59. 바울은 다른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께서 그들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알게 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이 세상에 있는 그 무엇이나 하늘이나 지옥에 있는 그 무엇도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끊을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바울은 그 사랑의 너비와 길이와 깊이와 높이를 다른 그리스도인들이 알게 해 달라고 간구한 것입니다.
60. 모든 좋은 선물은 하나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 옵니다. “모든 좋은 선물과 모든 완전한 선물은 위에서 오며 빛들의 아버지로부터 내려오거니와 그분께는 변함도 없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느니라.”(약1:17)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주셨습니다.
61.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자신의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것은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멸망하지 않고 영존하는 생명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3:16) “하나님께서 자신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사 우리가 그분을 통해 살게 하셨은즉 이것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향해 나타났느니라.”(요일4:9) 우리는 이러한 구절을 머리로 알 수도 있고 인용할 수도 있지만 우리의 삶에는 전혀 적용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62. 사도 바울이 기도했던 게 무엇인지 아십니까? “지식을 뛰어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심으로 충만하게 되기를 구하노라.”(엡3:19) 우리가 이러한 것을 단순히 머리로만 아는 게 아니라 지식을 완전히 뛰어넘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뿌리를 내리고 터를 잡아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63. 단지 아는 것으로 그치는 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의 삶을 통해 나타나야 합니다. 여러분은 단순하게 사랑한다고 말하는 남편이나 아내보다 예수님처럼 사랑하는 남편이나 아내를 원할 것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사랑에 대해 수많은 구절을 찾아줄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 삶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보여줄 수 있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랑하셨던 것처럼 사랑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64. 사도 바울이 에베소 성도들을 위해 무엇을 구했는지 아십니까? 그들이 물질적으로 더 풍성해지기를 구하지도 않았고 그들의 육신이 평안해지기를 구하지도 않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에베소에 있는 모든 성도들의 삶을 통해 드러나게 해 달라고 구했습니다. 그들이 주님의 사랑을 머리로만 아는 게 아니라 마음으로 알게 해 달라고 구했습니다. 주님께서 그들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마음으로 알게 해 달라고 구했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지식을 초월하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의 삶을 주관하게 되면 우리는 최고의 부모가 되고 최고의 남편이 되고 최고의 아내가 되며 최고의 교회 회원이 되고 최고의 시민이 되기 때문입니다.
65. 우리가 에베소서 3장을 통해 배운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형제들을 위해 기도해야 함을 배웠습니다. 그들의 눈이 열려서 이 세상의 권능이 아닌 하나님의 권능을 볼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함을 배웠습니다. 다른 성도들의 관심이 이 세상과 물질적인 것들과 겉 사람이 아닌 속 사람에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함을 배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다른 형제들의 삶을 주관하게 해 주셔서 그들이 이 세상을 살아갈 때 마치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을 사셨던 것처럼 살게 해 달라고 간구해야 함을 배웠습니다.
66. 병든 사람을 치료해 달라고 기도하는 게 잘못된 것은 절대 아닙니다. 다른 형제가 직장을 찾을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게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저는 그러한 것이 잘못된 기도라고 말한 적이 없습니다.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만이 우리가 확신을 가지고 구할 수 있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속 사람이 강건해 지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맞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구하면 반드시 응답 받게 됩니다. 우리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드러낼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맞는 기도이며 응답이 약속된 기도입니다. 이러한 기도는 하나님께 상달되고 응답 받을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습니다.
67. 전 우주를 통치하시는 위대하신 하나님께서 계십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그분 앞에 나아올 수 있는 특권을 받았습니다. 영원하신 분 앞에서 우리가 구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점검해 봐야 합니다. 영원히 가치가 있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봐야 합니다. 무엇이 진짜 중요한 것인지 생각해 봐야 합니다. 여러분이 다른 성도들을 위해 그들의 속 사람이 강건해 지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구하면 우리 교회에는 엄청난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를 도와주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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